1961년 몬자에서 개최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귀족 라인란트 가문 출신의 본 트립스는 그의 팀 동료인 미국인 팀 힐을 제치고 포뮬러 1 세계 챔피언십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1961년 시즌 마지막에서 두번째 라운드인 본 경기에서 폴포지션(출발 그리드의 맨 앞자리)으로 레이스를 시작했다. 힐은 4번째였다. 이것은 본 트립스에게 좋은 징조였다.
볼프강 본 트립스는 1961년 포뮬러1 세계 챔피언십의 첫 라운드인 모나코 GP에서 4위를 했다. 그는 참가한 3명의 페라리 중 3번째 였지만, 계속해 스쿠데리아의 시즌 첫 승리를 거두고 타이틀 레이스를 이끌어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했다.
1961년은 본 트립스에게 행운의 해였다. 그는 5월에 개최된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잔드보르트 해안 서킷의 모래 언덕을 달려 승리를 거머쥐었는데(레이스 처음부터 끝까지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는 1950년 F1 세계 챔피언십이 개막한 이래 독일 선수로는 최초의 우승이면서, 페라리 최초의 미드-엔진 포뮬러 1 차량이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십에서 승리를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참고로, 새로운 156 F1의 첫 승리는 그보다 1달 전 열린 비챔피언십 시러큐스 그랑프리에서 또다른 이름없는 영웅, 지안카를로 바게티가 달성하였다.)
두 달 후, 이 33세 백작은 에인트리(Aintree)에서 웨트(wet) 레이스로 진행된 영국 그랑프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페라리의 우승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156 ‘샤크노즈’는 1961년 F1 시즌을 장악했던 차량이었다. 하지만 젖은 노면 위에서 승리를 이끈 것, 그리고 위대한 영국 챔피언인 스털링 모스와 짐 클라크의 본국에서 그들을 이겼다는 것은 진정 그의 특별한 재능을 입증한 것이었다.
영국 그랑프리에서의 승리는 1961년 포뮬러1 시즌동안 페라리의 4번째 연속 우승이었고, 본 트립스는 그 해에 두번 포디움에 오른 최초의 드라이버가 되었다.
본 트립스가 강세를 보인 것은 단지 F1에서만이 아니었다. 1961년 4월 마지막날, 그의 페라리는 당시 가장 도전적이고 위험한 스포츠카 레이스로 꼽히던 시칠리아의 타르가 플로리오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그는 페라리의 첫 미드-엔진 스포츠카이자 신형 F1 차량과 병행 개발된 246 SP를 몰았다.
본 트립스는 미드-엔진 페라리 스포츠카 최초의 승리 및 미드-엔진 페라리 포뮬러 1 차량 최초의 월드 챔피언십 석권뿐 아니라 미드-엔진 페라리의 첫번째 승리를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페라리는 61년 시즌을 위한 개발 작업의 일환으로 프로토타입 미드-엔진 포뮬러 2 차량을 1960년 7월 24일 솔리튜트 그랑프리에 출전시켰다. 짐 클라크와 그레이엄 힐 등의 스타들이 탑승한 라이벌 F2 차량들이 출발 그리드를 꽉 채운 대회에서 본 트립스는 새로운 랩 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했다.
1961년 르망 24시에서 촬영된 울프강 본 트립스는 팀원 리키 긴터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두 사람은 페라리 246 SP를 몰고 여러차례 선두를 달리다 17시간 만에 연료 계산 착오로 인해 2위에 머물렀다.
1961년은 본 트립스에게 가장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1956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페라리 레이서로 데뷔한 후 5년 동안 스쿠데리아에서의 성과는 썩 좋지 못했다. 몬자의 쿠르바 그란데 출구에서 연습 중 충돌하며 불길한 시작을 보였다. 차가 한바퀴 돌며 본 트립스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왔는데, 훗날 그는 촉촉한 흙 냄새가 반가운 생존 신호였다고 회상했다. ‘태피(Taffy)’라는 애칭으로 주로 불렸던 본 트립스는 1년 후 몬자에서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1961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가장 좋은 공동 성적이었다.
본 트립스의 1961년 세계 챔피언십 우승이 기대됐던 운명적인 이탈리아 그랑프리의 두번째 랩에서 그는 짐 클라크의 로터스와 경쟁하고 있었다. 두 차량의 속도는 150mph에 이르렀었다. 클라크는 무사히 방향을 틀었지만 본 트립스는 운이 없었다. 그의 차는 횡경사를 타고 한바퀴를 돌아 관중석의 허술한 철조망에 쳐박혔다. 본 트립스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 이미 사망했다. 울타리에 기대어 있던 15명의 관중도 목숨을 잃었다.
힐이 이 대회에서 우승하고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힐도 페라리 팀도 승리를 축하할 기분이 아니었다. 페라리 팀은 다음 시즌(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US 그랑프리 출전을 포기했다.
볼프강 본 트립스(오른쪽)와 동료 필 힐이 1961년 포뮬러 시즌1 2라운드 네덜란드 GP에서 페라리의 1-2를 축하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올해의 마지막 라운드까지 세계 챔피언십을 놓고 경쟁을 펼쳤으나, 본 트립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타이틀이 미국 팀에 넘어가게 되었다.
본 트립스는 슈마허처럼 성공의 시절 대부분을 페라리에서 보냈다. 이 위대한 독일 레이서들 간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서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본 트립스는 1961년, 쾰른 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 근처에 고-카트 트랙을 설치했는데 어린 미하엘 슈마허가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카트를 몰고 첫번째 랩을 완주한 곳이 바로 이 트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