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카토(Avvocato, 이탈리아어로 변호사)" 아넬리가 없었다면, 페라리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자부심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구 유럽의 많은 자동차 제조업체들처럼 페라리는 미국이나 프랑스 혹은 중국의 소유가 되었을 수도 있다. 20년 전 1월 24일에 세상을 떠난 지아니 아그넬리(Gianni Agnelli)는 페라리의 고객이자 파트너였으며, 이후 페라리 소유주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늘 스쿠데리아의 열렬한 팬이자 호기심 가득한 페라리 컬렉터였다.
1969년 6월 21일에 발표된 합의가 없었다면, 페라리가 월스트리트에 상장되고 그 다음에 피아자 아파리(이탈리아 증권거래소가 있는 광장)에 상장하는 꿈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6월 21일, 피아트는 엔초 페라리가 사망하는 날에 페라리 지분을 90%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후, 페라리 지분 50%를 소유하며 페라리를 지원키로 했다.
지아니 아그넬리와 엔초 페라리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 모두 회사에 깊은 열정을 갖고 있지만 사업에 대해 절대 논쟁하는 법이 없었다.
아그넬리는 항상 페라리와 페라리 차량을 사랑했다. 그는 페라리 차를 사실상 주문 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그넬리가 원-오프를 발명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아그넬리의 페라리 차량 중 일부가 모데나에 위치한 엔초 페라리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여기서 그의 미적 취향과 페라리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었다. 페라리에 대한 아그넬리의 사랑은 166MM과 함께 시작됐다. 1948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아그넬리는 페라리의 우아함에 매료됐고, 차량 내부까지 녹색과 파란색으로 맞춤 제작한 차를 원했다. 그의 첫번째 페라리 원-오프 차량이었고, 역사상 최초의 바르케타였다. 그 후 1952년, 아그넬리는 페라리 212 인터(212 Inter)에 매그놀리아 화이트 색상의 루프와 “패밀리” 투톤 456 블루를 조합했고, 야간에도 고속 운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설계된 가시성 높은 두 개의 헤드라이트를 추가했다.
아그넬리는 특정 모델을 좋아하게 되면, 그것을 주문 제작하곤 했다. 1955년 그는 바티스타 피닌 파리나가 디자인한 375 아메리카의 터널 중앙에 값비싼 크로노그래프(시계)를 배치했다. 1959년에는 피닌파리나의 원-오프 차량인 400 슈퍼아메리카로 과거에 대한 접근법을 뒤집고 스타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었다.
아그넬리는1980년대 중반 테스타로사 스파이더를 요청할 때처럼 새로운 디자인과 특별한 컬러로 보닛을 완성하는 등 차량 제작에 있어서 디테일을 개선하는 주요 작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그가 요청한 테스타로사 스파이더의 차체 톱은 매그놀리아 화이트로 장식되고, 그리지오 뉘르부르크링으로 리버리를 마감됐으며, 실내는 블루로 꾸며졌다. 또한 1989년 F40엔 블랙 패브릭 시트 커버와 발레오 전자 클러치를 장착해 개인 맞춤화 하길 원했다. 아넬리는 따뜻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2000년, 360 스파이더의 스타일을 기반으로, 훨씬 더 극단적인 원-오프 바르케타의 디자인을 피닌파리나에 맡겼다. 그 차는 페라리 전 사장이었던 루카 디 몰테제몰로(Luca di Montezemolo)의 결혼 선물로 특별 제작된 것이었다.
피아트와 페라리의 합병 계약은 1969 년에 이루어졌으며 양측은 인수가 돈에 기반한 것이 아닌 창의성과 가능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아그넬리는 로드카에 대해 종종 아주 특이한 요청을 했는데, 그건 1948년 첫 번째 페라리를 주문했을 때 이미 시작한 습관이었다. 하지만 아그넬리는 팀 운영에 있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의견을 존중했다. 종종 헬리콥터를 타고 개인적으로 테스트나 그랑프리 선발전을 보러 갔다. 기술자, 운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팀에 조언을 건네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엔초가 있는 동안, 페라리는 결코 유벤투스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아니 아그넬리의 강인함과 인품, 사업 감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부회장인 피에로 페라리는 회상했다. "1969년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강력한 파트너십을 이끈 결정적인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수 년에 걸쳐 결속을 다졌기 때문에 두 분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이해가 있었죠. 저는 아그넬리를 만나 기쁨에 들떠 있었고 역사적인 날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피아트와 함께 라면 저희 회사는 연속성과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아그넬리와 피아트는 페라리의 미래를 약속했다. 그들은 회사의 경제적 부담을 없애 다른 영역에서 독창성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피아트와 아그넬리는 마라넬로가 원하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대부분의 기업 인수에 수반되지 않는 두 가지 요소, ‘존경’과 ‘지식’이 있었다. 1969년 합의 너머엔 ‘돈’보다는 ‘사랑’이라는 동기가 있었다.
F40, 파란색과 녹색의 166MM 및 1952 블루 212 인터를 포함하여 페라리가 지아니 아그넬리를 위해 제작한 화려한 차량들 중 일부는 그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세심하게 맞춤 제작 되었다.
1988년 8월, 엔초 페라리가 세상을 떠나자 피아트는 페라리의 대주주가 되었고 회사지분의 10%를 피에로에게 남겼다. 이미 토리노에서 주요 간부들이 오고 있었다. 미하엘 슈마허를 영입할 때 아그넬리의 승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아그넬리는 드라이버 선택에 있어서도 항상 마지막 코멘트를 덧붙이는 등 팀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강화됐다.
어느 날 아그넬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슈마허라는 자가 도대체 누구지? 그가 요구한 돈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까?” 하지만 그 돈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전, 슈마허는 F2003 GA머신으로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GA는 지아니 아그넬리를 의미한다. 당시 회장인 루카 디 몬테제몰로(Luca di Montezemolo)는 오너 그 이상이었던 아그넬리를 위해 헌신의 의미를 담아 이 차를 제작하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