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340 멕시코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바로 1952 카레라 파라메리카나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
340 멕시코는 단 4대만 제작되었지만 페라리의 내구 레이스에 대한 헌신, 그리고 가장 위험한 공도 레이스라고 일컬어지는 경주에서 페라리가 성공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멕시코 정부는 새로 완공된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를 전 세계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카레라 파나메리카나 (Carrera Panamericana)를 구상했다. 5일 동안 열리는 본 행사는 9단계에 걸쳐 총 3,500km의 도로를 질주하는 레이스였다.
많은 미국 드라이버들에게 이 독특하고 까다로운 도전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1950년 5월 5일에 개최된 첫 경주에는 130대 이상의 세단과 함께 아마추어와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340 아메리카를 개조해 만들어진 340 멕시코는 처음부터 엄청난 거리와 다양한 도로 지형에 대처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설계되었다. 리어 액슬과 변속기도 더욱 강화했으며, 150 리터 연료 탱크도 추가되었다.
확실히 위험하긴 했지만 (슬프게도 첫 행사가 개최된 5일간 세 명의 드라이버가 사망했다) 본 레이스의 우승자인 허쉘 맥그리프(Hershel McGriff)가 자신의 올즈모빌 88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을 때 유럽의 엘리트 레이싱 커뮤니티는 이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주문 제작한 무거운 차량으로 경주에 참가했기 때문에 팀의 지원(트럭이 예비 부품을 따로 운반해야 했고 게다가 험한 도로 지형 때문에 새 타이어와 브레이크도 실어야 했다)이 필요했다. 반면, 허쉘의 가볍고, 개조되지 않은 올즈모빌은 가파른 산길을 쉽게 달릴 수 있었다. 그가 미국의 거대 기업을 물리치면서, 엔초 페라리는 페라리 팩토리팀이 이듬해인 1951년도에 본 레이스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주행 도로는 판 아메리카 고속도로에서 이루어졌다; 1951년에 1위와 2위를 기록한 212 인터 쿠페 중 한 대; 1952년 340 멕시코로 결승선을 통과한 루이지 치네티; 페라리의 필 힐(Phil Hill)과 같은 유명인사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
엔초의 생각은 옳았다. 페라리는 F1 챔피언 피에로 타루피(Piero Taruffi)와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가 운전하는 2대의 212 인터 쿠페로 1위와2위를 차지했다. 이듬 해 경주에 복귀하였을 때는 5일 동안 열리는 행사의 독특하고 까다로운 조건에 대처하기 위해 완전히 새롭게 제작된 340 멕시코로 출전했다.
이전에 비해 52년도의 레이스는 초반부터 매우 치열한 경쟁 양상을 띠었다. 당시 본 경주는 유럽 자동차 업계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재규어와 메르세데스, 란치아, 포르쉐와 같은 회사들은 주최 측에 새로운 유로피언 스포츠카 카테고리를 만들도록 설득할 만큼 충분한 출전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340 멕시코는 이미 1년 전 밀레밀리아(Mille Miglia)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페라리 340 아메리카를 개조해 만들어진 차량이다. 멕시코를 위한 비냘레(Vignale) 디자인에는 4.1리터 람프레디 V12 엔진을 덮는 77.5인치의 긴 후드가 포함돼 있어 출력은 280마력, 최고속도는 시속 282km에 이른다. 또한 개조된 5단 변속기와 함께 새로운 실린더 헤드가 추가됐는데 본 실린더 헤드에는 이미 뛰어난 엔진의 출력을 한층 더 높여주는 4중 카뷰레이터가 장착돼 있다. 리어 액슬과 변속기도 더욱 강화했으며, 자동차가 달려야 하는 주행 거리를 고려해 150리터 연료 탱크도 추가됐다. 우승을 위해 만들어진 차량이지만340멕시코는 불행히도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페라리 역사상 가장 긴 후드 중 하나가 포함되어 있는 340 멕시코는 시속 282km를 낼 수 있는 4.1리터 V12을 자랑한다.
미국 페라리의 단독 에이전트이자 NART(North American Racing Team)의 창설자인 루이지 치네티(Luigi Chinetti)는 1년 전 피에로 타루피(Piero Taruffi)의 동반 드라이버였기 때문에 코스를 잘 알고 있었고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카리는 전년도 경주에서 2위를 차지했고 올해 우승을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레이스에 참여한 92대 중 단 39대만이 완주한 코스는 첫날 충돌 사고가 있었던 아스카리에게는 너무 험난했고, 치네티에게 결승선을 통과하는 과제를 넘겨줘야 했다. 결국 치네티는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듬 해 경주에서는 란치아가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1954년에는 움베르토 마글리올리(Umberto Maglioli)가 페라리 375 플러스로 우승했고 뒤를 이어 필 힐(Phil Hill)이 375MM로 2위를 차지했다. 그것이 마지막 경주였다. 5년 동안 27명이라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이 행사는 결국 취소됐지만, 거의 5년 동안 페라리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내구 레이스 중 하나에서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