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린 서티스는 자신의 길을 향해 꿋꿋이 나아갔다. 그는 1950년 지역 내 모터사이클 경기 참가를 시작으로 1952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는 노튼(Norton)과 함께 모터사이클 월드 챔피언십에 데뷔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MV 아구스타(MV Agusta)팀으로 이적했다. 서티스가 총 7번의 월드 타이틀을 획득함에 따라 이 조합은 역대 가장 성공적인 파트너십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350cc 클래스에서 총 세 번(1958년, 1959년, 1960년) 우승했고, 최상위 500cc 카테고리에서 1956년 우승한 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 연속으로 승리하며 총 네 번의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티스에게 사륜차로의 전향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같은 영국 출신의 마이크 호손(Mike Hawthorn)이었다고 한다. 페라리 드라이버였던 호손은 1958 시즌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직후였고, 런던 파크 레인에서 열린 <올해의 스포츠맨> 행사에서 서티스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요크셔 출신의 장난기 많던 호손은 서티스에게 “이봐, 존! 언젠가 차를 한 번 몰아봐요. 바이크보다 균형감이 좋아 세우기 더 쉽잖아요”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1년 후, 서티스는 로터스의 대표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으로부터 제안을 받게 된다. 채프먼은 향후 이륜 경기 일정과 겹치지 않는 레이스에 참가할 수 있도록 서티스에게 포뮬러 원 차량을 제공했다. 서티스는 영국 그랑프리에서 2위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서티스가 MV 아구스타에서 활동할 당시 정비사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기에 그는 이탈리아어를 조금 배웠다. 그는 페라리 직원들과 창립자 엔초 페라리 또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티스는 엔초가 엔지니어와 드라이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매우 까다로운 인물로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간파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유능한 젊은 영국인 서티스는 페라리의 첫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당시 그는 아직 “붉은 행성”으로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서티스는 1963년에 페라리와 계약을 체결했다. 엔초는 영국인 드라이버들을 좋아했는데, 그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더 준비가 잘 되어있으며, 기회를 잡기 위해 때로는 더 큰 위험도 감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티스와 엔초 사이에는 즉각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 엔초는 서티스가 약간의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실제로 서티스가 팀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서티스가 스쿠데리아로 데뷔한 시즌은 1961년 두 개의 포뮬러 원 타이틀 석권에 기여했던 엔지니어들이 대거 떠나고 팀을 재정비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티스는 어렵기로 유명한 뉘르부르크링에서 첫 승리를 거머쥐었다.
1964년 스쿠데리아는 새롭게 개발한 158 F1을 선보였다. 본 차량은 새로운 직분사 시스템이 적용된 90도 V8 엔진으로 210마력 이상의 출력을 발휘했다. 서티스가 비챔피언십 경기인 시라쿠사 GP에서 우승하면서 좋은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즌의 초반부는 순조롭지 못했다. 서티스는 네덜란드 경기 중 세 번의 레이스에서 리타이어하며 최종 순위 2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후 8월 독일 그랑프리와 9월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타이틀 경쟁에 다시 복귀했다.
10월 초 왓킨스 글렌에서 서티스는 같은 영국 출신의 그레이엄 힐(Graham Hill)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는 챔피언십 역사상 타이틀 경쟁이 마지막 경기까지 이어진 세번째 사례였다. 10월 말, 서커스(챔피언십 경기의 비유적 표현)가 멕시코 시티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BRM 소속의 그레이엄 힐이 39 포인트로 선두를 유지했고 이어서 서티스가 34 포인트, 로터스의 짐 클라크(Jim Clark)가 30 포인트를 기록했다. 서티스 또는 클라크가 1등을 차지하지 않고 서티스가 3위 이하에 머무를 경우 힐은 3위로 경기를 마무리해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다. 페라리 드라이버 서티스가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승하거나 힐이 4위 이하일 때 반드시 2위를 유지해야 했다. 반면 클라크의 경우 서티스가 3위 이하, 힐이 4위 이하에 머무를 때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경기 초반 완벽하게 치고 나가는 클라크(로터스 소속)와 달리 서티스는 다소 느린 출발을 보였다. 클라크가 첫번째 랩에서 댄 거니(브라밤 소속)와 반디니(페라리 소속)를 2초 차이로 앞선 반면, 힐(BRM 소속)과 서티스는 각각 10위와 13위로 뒤처져 있었다. 18번째 랩까지 클라크는 거니와 힐, 반디니, 서티스를 모두 제치고 선두를 유지했다. 이후 반디니가 힐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평소 침착한 힐도 여러 차례 위협적으로 다가온 반디니에게 헤어핀 구간에서 분노를 표하며 주먹을 흔들 정도였다. 결국 그 다음 랩에서, 페라리가 동일한 헤어핀 구간에서 BRM을 공격하면서 예견된 일이 벌어졌다. 두 차량(힐과 반디니)은 충돌하며 회전했지만 다행히 두 드라이버 모두 경기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틈을 노린 서티스가 3위로 올라섰다.
이 모든 상황이 합쳐지면서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결승전이 연출됐다. 클라크는 8바퀴를 남겨두고 선두를 유지하다 헤어핀 구간에서 미끄러운 기름 자국에 방해를 받아 코스를 벗어났다. 이로써 거니가 체커키를 차지하며 승리했고 서티스가 2위에 올랐다. 서티스는 11위로 경기를 마무리한 불운의 힐을 1점 차로 따돌리며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와 함께 페라리는 두번째 컨스트럭터 타이틀도 차지했는데 올해가 바로 그 역사적인 날로부터 60주년이 되는 해다.
‘빅 존(Big John)’이라는 애정 어린 별명으로 불렸던 서티스는 2017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모터스포츠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서티스에 이어서 여섯 명의 영국인 드라이버 - 마이크 파크스(Mike Parkes, 1966-1967), 조나단 윌리엄스 (Jonathan Williams, 1967), 데릭 벨(Derek Bell, 1968), 나이젤 멘셀(Nigel Mansell, 1989-1990), 에디 어바인(Eddie Irvine, 1996-1999), 올리버 베어만(Oliver Bearman, 2024년 3월 열린 사우디 아라비아 GP에서 건강 문제로 결장한 카를로스 사인츠를 대신해 출전하며 경기에 데뷔했고 7위로 레이스를 마감했다) - 가 스쿠데리아 페라리 팀 소속으로 활약했다. 베어만은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에서 페라리 차량을 운전한 14번째 영국인 드라이버가 됐다. 여러 차례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루이스 해밀턴이 15번째 영국인 드라이버로 합류하며 다음 시즌 스쿠데리아 페라리 HP에서 영국의 불꽃을 다시 지필 것으로 기대된다.